Part 4 주제별 이야기/세계관&이야기

기독교 세계관으로 가르치기 by 알버트 그린

꿈꾸는꼬목사 2019. 10. 27. 21:29

 

서론
- 예언자적 목회의 과업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지배 문화의 의식과 지각에 대안이 되는 의식과 지각을 기르고 자양분을 공급하고 고취시키는 것이다 (월터 브루그만)
- 우리의 사고는 계몽주의 개념과 철저히 혼합되어 있다. 
- 그리스도인 가정은 어린이들이 사랑을 배우는 곳이며, 교회는 죄로부터의 구원을 배우는 곳이고, 학교는 그들 주위의 세계를 배우는 곳이라는 생각은 이상적이다. 
- 지혜에 대한 사랑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변화된 비전과 성경적 의식이 없이 창조세계를 설명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창조세계를 배제하고 만든 교과과정을 통해 아이들이 주님을 알게 되고, 사랑하고, 섬기는 법을 배울 것이라는 생각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1부 이 시대를 이해하기

1장 계몽주의
p.23 르네상스는 자주 기독교에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르네상스는 교회와 성경과 관련해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p.24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것은 과학 혁명이 우리 주위의 세상을 이성적으로 연구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인 세계관, 즉 이성주의 세계관으로 재발리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초기 과학자들은 그들의 작업이 기독교 신앙을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들의 탐구 활동을 이끈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통제되는 창조세계 안에 있는 법칙들과 과정들의 규칙성에 대한 확신이었다. 이런한 이유로 동양보다 서양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계관은 과학적 연구와는 다르다. 칼 사강이 TV에서 "우주는  모두 거기 있으며, 그 곳에 있었고, 계속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말할 때, 그는 과학이 아니라 철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에 일어난다. 이러한 생각은 과학은 기독교 신앙과 반대되는 것이며,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진리가 전혀 아니다라는 일반적인 개념으로 이끌어 왔다. 

p.26 18세기 중반까지 우주와 삶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생겨났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은 계몽주의라고 알려졌다. 

p.26 실재는 이제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발견되고 기술되어지며, 물리적으로 "저기 밖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계몽주의 의식에서 가장 중요하고 비극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는 사실이 중립적이거나 가치 중립적이라는 개념이다. 계몽주의 시대까지 모든 사람은 우리가 지금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목적이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과학 혁명의 아버지인 베이컨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사물의 목적은 잊어버리고 그 원인을 찾으라고 촉구하였다. 계몽주의 의식에서 진리는 과학적인 사실과 밀접한 연관되었으므로 더 이상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이 과학에 의존하고 있다면 진리는 그 자체가 이제 상대적인 것이다. 오늘 진리인 것이 내일은 더 이상 진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p.28 계몽주의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 중의 하나는 원죄의 교리가  인류에게 주입된 가장 나쁜 것들 중 하나라는 확신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한 존재로 전제되었다. 인간은 이성으로 세상을 개선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 세상의 문제는 개인의 왜곡된 마음으로부터가 아니라 타락한 사회조직으로부터 생겨난다고 생각되었다.

p. 28 계몽주의가 진행됨에 따라 진보의 개념도 바뀌었다. 동방의 고대세계에서 진보의 개념을 가진 사람들은 히브리인들 뿐이다. 역사에는 진보가 있고 마지막 목표가 있다. 계몽주의 세계관이 서양 세계로 침투하여 들어오자 상황을 개선할 수 있으며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진보의 개념을 점유하였으며, 과학이 지속적으로 인간의 삶을 더욱 더 향상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세상에 도래할 천국에 대한 희망은 여기 현재의 삶을 향상시킬 계몽주의에 대한 확신으로 대치하였다. 따라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진보는 그 자체로 계몽주의의 기초교리가 되었다. 19세기 중반에 다윈에 의해 효과적으로 소개된 진화론은 이러한 개념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으며 현대의 기초적인 사실로서 확립되었다. 인간의 능력에 대한 비관주의로부터 하나님의 영향 없이도 이 세상에서 인간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낙관주의로의 이동은 인간의 권리를 강조하게 되었고, 세상을 새롭게 할 정부의 형태로서 자유 민주주의를 지지하게 되었다.

p. 29 교육의 목적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인생에서의 성공, 특별히 경제적인 면에서의 성공으로 옮겨갔다. 인간의 진보가 이 땅에서의 실질적인 천국을 제공할 것이라는 약속 때문에 앞으로 도래할 삶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감에 따라 학교 교육은 성경에 대한 관심에서 세상적인 성공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다.

P.29 인간의 이성을 완벽하게 사용함으로써 삶을 의미있게 만들수 있는 독립적인 행위자로 여겨졌다. 진리는 중립적인 사실로서 여겨지게 되었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분리는 초, 중등학교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종교에 관련된 언급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계몽주의 사고가 학교에 미친 효과 중에 가장 파괴적인 것은 아마도 도덕과 윤리 교육을 무시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해될 수 는 있으나 받아들여질 없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만일 과학적 사고로서 실증될 수 있는 것만이 진리라면 윤리학은 가르쳐질 수 없다. 왜냐하면 윤리학은 인간 삶의 사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지 공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장 포스트 모더니즘
p.33 20세기 초엽에 세계는 평화와 진보의 새 시대로 접근했다는 낙관주의가 확산되었다. 역사적으로 20세기에 일어난 몇가지 일련의 사건들이 계몽주의로 인해 성장했던 희망의 거품을 걷어내고 신뢰감을 사라지도록 이끌었다. 낙관주의를 무너뜨린 첫번째 사건은 제 1차 세계대전, 1929년 대공황,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계몽주의가 약속한 중단 없는 진보에 대한 신뢰감의 상실로 이어졌다.

p.34 이성주의에서의 기계주의에 대한 강조, 즉 계몽주의의 세계관은 많은 훌륭한 사상가들에게 불편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그 결과는 인간의 느낌과 자연의 아름다운 강조한 낭만주의의 발달이었다. 휘트만, 에머슨의 미국의 낭만주의 작가는 19세기 말에 이르서서는 철학자들ㅇ른 실재에 대한 믿을만한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기하였다. 20세기에 철학의 관심은 인식론에서는 실용주의로, 가치론에서는 실존주의로 옮아갔다. 그의 입장은 인간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ㅇ린 방법으로 진리를 만드는 것이다.

 p.34 실존주의는 인간인 우리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지를 결정할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의해 우리 자신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인간성에 대한 그러한 정의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거나 격려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분명히 실용주의의 실존주의는 계몽주의의 근대성을 대신할 관점의 뿌리가 된다. 이러한 전망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알려졌다.

p.35 포스터모더니즘은 계몽주의의 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이 가지고 있는 약점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학자들간의 동의가 없는 상태이다.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떠한 궁극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정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적이고 독립적인 자아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는다. 그들은 인간은 그들이 언어와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적 뿌리는 하이데어의 철학에 놓여있는 것 같다. 그의 견해는 반인본주의라고 묘사된다. 그는 보편적인 인간성을 부정하였으며, 인간은 더 이상 중심에 있지 않다. 중심이란 없다라고 말하였다. 포스터모더니즘은 인간보다 언어를 좀 더 잘대접한다. 언어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만든다. 언어가 우리를 구속할 뿐 아니라 힘의 추구를 감춘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단순한 진실한 이야기를 말해주는 저작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과 같은 포스트모던 의식에 의해 계몽주의자들에게 매우 중요했던 진보의 개념은 더 이상 타당하거나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다른 양상은 부족주의의 부활이다. 

p.39 포스터모더니즘이 교육에 끼친 영향 :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이 종교를 무의미하게 만들어왔다는 이성주의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실재를 설명하려는 모든 세계관을 거부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주의 세계관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반면, 동시에 유일하고 진실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그리스도인의 주장에는 격렬하게 반대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절대적 진리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하나의 진실된 세계관은 없다고 주장한다. 진리의 사라짐과 함께 도덕 원리도 사라진다. "학습할 객관적인 진리가 없다고 확신한 교사들은 지식 대신에 경험을 제공하며 기존의 가치를 의심하고 그들 자신의 가치를 창조할 것을 격려하면서 '과정을 가르친다.  

3장 대안의식
p.49  우리가 오늘날 어디에 있는가란 문제에 대한 성경적 견해를 이해한다면, 대안 의식을 기르는 것보다 교회에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

p.51.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의식은 세계관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관은 사실상 철학의 기초가 된다. 세계관은 일반적으로 무의식 수준에 위치한다. 모든 사람이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세게관을 가지고 있는지 거의 모르고 있다. 세계관이 의식의 수준으로 떠오르고,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활동하게 될 때 우리는 철학을 갖는다. 

p.53 지식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식은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는 창조세계 안에서 그리고 그 창조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내시려는 의지를 포함한다. 이성보다 지식이더 중요한 것이 있다. 

p.56 도덕성은 기독교학교가 공립학교의 차이를 보이는 또 다른 중요한 영역이다. 교육과정에서 학생들에게 반응을 요구하지 않는 과목이 없다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4장 가르침과 배움 그리고 하나님
p.61  어떻게 가르침과 배움이 인간의 마음과 지성 안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는가? 여기에서 어떠한 대안 의식이 우리에게 가능한가? 어떠한 마음의 갱신이 요구되는가?

p.62 가르침은 항상 하나님께 대한 반응을 구해야 하며, 학습은 항상 하나님께 대한 반응을 포함하여야 한다.

p.65 성경말씀이 소위 "영적"인 것에 제한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현대의 교회 안에 편만해 있는 우상숭배적인 이원론을 영속시키며, 새로운 이교도 세상 안에서 교회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 모든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다. 실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갈망하는 마음을 우리의 마음 속에서 자라게 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대안의식이다.

p.67 아마도 창조계 안에서 어떤 것을 아는 것은 궁극적으로 창조주를 아는 것을 포함한다.

p.68 알렉산더 쉬메만 : 성경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은 종교나, 에배의 행위가 아니라 바로 삶의 방법이다. 기독교 학교의 과업은 어린이들에게 동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의 의미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어린이들이 창조계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도록 이끄는 것이다. 

p.72 학생에게 있어서 다양한 교과목과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서로 교제할 수 있는 경험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5장 기독교 학교에서의 찬양과 감사
p.75  기독교 학교는 세속적인 학교와 어떻게 다르며, 또한 기독교 학교의 졸업생들이 어떻게 우리 문화에서 일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기도와 감사는 아마도 모든 학교의 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교사와 학생들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대안의식을 발달시킬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p.80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은 자기 정체성과의 관련되어 있지만 비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식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것에서 발견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섬김으로서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하나님과 동일시 된다. 

p.86 첫째, 창조세계는 자기 자신을 게시하려는 목적, 둘째, 창조하시고 계속 붙들고 계셔서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교제할 수 있도록 하셨다. 만일 하나님의 지식이 영생이고, 기독교 학교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창조계에 관심을 둔다면, 공부하는 일은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에배와 봉사와 찬양으로 전환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