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 우리의 복음(4)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향하여
본문 : 누가복음 2:1-6
날짜 : 2014년 8월 3일 1:30
[ 이카루스 이야기 ]
- 세스고딘의 ‘이카루스 이야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이카루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는 건축가이며, 조각가인데, 크레타의 섬의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한 미로를 만들기도 한 사람이다. 손재주가 비상하여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발명가였다. 미노스왕의 뜻을 거역한 죄로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그 미로에 갇히게 된다. 다이달로스는 탈출을 위한 기발한 계획을 세운다. 바로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것이다.
-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태양에 너무 가깝게 가지 마라. 밀랍이 녹는다. 물에 닿지도 마라. 깃털이 무거워진다. 너무 높게도, 너무 낮게도 날지말라는 한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것에 도취된 이카루스가 그 말을 잊고 높이 올라가다가. 밀랍이 녹아서, 떨어져 죽게 된다.
- 어찌보면 지금 젊은 세대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너무 튀어도 안되고, 존재감 없어도 안되고. 그 중간을 걸어가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그러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져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모험하지 않고, 어느 정도 수준의 삶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도록 길들여지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 참 무능해진 시대 ]
- 한국사회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지금은 3포시대라고 합니다. 연애/결혼/출산, 그리고 하나가 더 추가되었지요. 취업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택구입까지 추가되어서 5포 세대라고 말한다. 포기할 수 밖에 없는, 무능해질 수 밖에 없는 시대임을 깨닫는다.
- 세월호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 속상한 것이,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배 안에 있는 아이들을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 이후로, 언론을 통해서 전해지는 기사들은 너무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을 힘들게 합니다. 시간은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는... 그러기에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무력하고, 무능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시대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 사회적인 것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삶 역시도 그렇게 쉽지는 않다. 청년 세대들에게 지금의 시대는 자신의 능력과 실력보다는 구조와 시스템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시기이다. 그러기에 무력하게 당해야하기도 하고, 시스템에 희생을 당해야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냥 지켜보기만 해야 할 때도 많다. 돌아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생각을 더욱 하게 된다. 아니 때로는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도록 요구받는다!
- 내 삶 속에서도, 그 무엇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여러 가지로 상황으로 막히기도 하고, 내가 하려고 노력을 해도 되지 않을 때도 있다. 회사나 가정에서도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참 왜 이렇게 초라해보이고, 모자라 보이고, 부족해보이는지 모르겠다. 문득 문득 좌절하고, 낙심하고, 무너져 있을 때가 생긴다.
-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무능함과 무력함에 너무 가슴아파하며 힘들어할 때가 있다.
- 개인적으로 가장 무능하고, 무력하다고 생각했을 때가, 아내와 결혼을 해서 인도에 갔을 때이다. 아기를 가져서 입덧을 하고 있는 아내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이다. 먹고 싶은 것을 해줄 수도 없었고, 구해줄 수도 없었고, 나의 선택과 결정으로, 이러한 고생을 겪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이다. 첫째 종훈이는 태어나기 일주일 전에 왔으니, 태교는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빵점 아빠인 셈이다.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다.
[ 오늘 본문 말씀으로 ]
- 본문 말씀을 읽다보면, 우리가 생각하고 예상하는 것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 창조주인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다. 얼마나 멋지게 오실까? 얼마나 폼나게 오실까? 얼마나 강력하고, 멋진 모습으로 오실까 기대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는 너무나 무력하고, 무능하고, 초라한 존재들만이 나타난다.
- 제일 먼저는 요셉이다. 호적을 하러갈 때, 굳이 마리아를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혼자 남아있을 마리아를 생각해서 함께 동행해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이다. 배려는 했지만, 책임지지 못하는 인생이죠! 함께 가지만, 아기를 낳을 여자를 위해서 방 하나 구해주지 못하는 요셉! 안되는게 어디있어요? 열심히 다녀보고, 최선을 다해서 돌아다녀야지요. 그런데 결혼할 여자와 아기를 마굿간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마굿간에서 보낼 수 밖에 없는 착하지만 무능한 남자 요셉!
- 그리고는 아기 예수님. 비록 아기지만, 메시야이며, 하나님이신데, 하실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냥 울기만하고, 젖을 달라고 하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 마리아와 요셉의 도움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생존조차 할 수 없는 예수님... 정말 이 아기가 메시야 맞나? 우리를 구원해줄 존재가 맞나? 무력하고 무능해도 너무 심할 정도이다.
- 마지막으로 하나님! 이 땅의 창조주이시고, 이 땅의 왕이시며,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면서, 좀 더 멋지게, 폼나게, 보내시면 안되나요? 그것도 로마의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이 땅의 메시야가 움직여야하는 상황이 된거지요. 너무 폼 안나는거죠. 왕이 오시는데 의전도 없고, 맞이하는 사람들이라고는 가장 천하고 천한 목자들과 별을 보고 온 외국인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공급자 하나님이신데, 자기의 아들을 위해서 멋지고, 편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준비해놓으시면 안되나요... 너무나 초라하고, 냄새하고, 더러운 마굿간에 가게 하시죠.. 참 하나님도 너무나 무력하고, 무능하신 모습이지요..
[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
이런 무능함과 무력함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네~ 무시당하는 것도 싫고,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싫고! 초라해보이기도 싫고!
그래서 분노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기도 하다.
특별히 ‘권력’지향적인 사람의 경우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숨기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더 차갑게 대하기도 하고,
오히려 더 강해지려고 하고, 더 힘을 가지려고 하고, 더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쓴다.
바로 그것은 우리가 반응하는 모습이다. ‘사망’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모습이다!
[ 도대체 왜 이것이 복음의 소식이 될까? ]
우리 인생에 그런 때가 있다. 평생 그러느냐 아니다.
살면서, 내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으로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시간이 있다.
오늘 말씀은 자신이 너무나 무능하고, 무력하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향한 복음입니다.
너의 무능함과 무력함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으로 네 인생을 초라하게 만들지마라
무능함과 무력함의 순간이 너의 인생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
무능함과 무력함의 시간이 너의 인생을 망하게 하지 않는다! 염려마라!
오늘 말씀을 나눌 때, 여러분 삶에 복음이 선포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오늘 나눌 복음 : 무능함과 무력함은 ‘통로’가 된다는 겁니다.
- 요셉은 무능했고, 무력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은 무능하시거나 무력하지 않는 분이신데...무능과 무력했다는 것은!...무능과 무력을 택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겁니다. 어쨌든 요셉, 하나님, 예수님의 공통된 점은 무능함과 무력함입니다.
- 왜 그래야했을까요? 바로 그것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통로’셨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저 멀리 있는,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누구나 올 수 있는 마굿간으로, 그리고 어느 누구도 긴장하거나 방어하지 않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가장 약한 모습으로 오신거지요. 가장 약한 모습이셨기에 우리가 바라볼 수 있었고, 만져볼 수 있었던 겁니다!
- 우리는 아기를 보면 다가갑니다. ‘주안’이를 보면, ‘효상’이를 보면 다가갑니다.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바라보고 만져주고 사랑해줍니다. 왜 그런가요? 사랑스럽기 때문이고, 우리가 보호해주어야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지켜줘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겁니다.
-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거룩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너무나 멀리 있는, 내가 가까이 가지 못하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의 손길과 눈길과 사랑이 필요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친근한 모습으로 우리에게도 오셨음도 이야기하고 있다.
[ 하나님께 나아오는 통로 ]
- 어니스크 커츠와 캐서린 케첩의 ‘불완전함의 영성’이라는 책에 보면, ‘신은 상처를 통과해 온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연약함과 깨어짐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거다.
- 우리의 무능함과 무력함의 모습은 ‘힘’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시편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를 도와줄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바라보고 찾는 겁니다. 우리의 무능함과 무력함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을 찾는 시간이 됩니다.
- 무능하다고, 무력하다고 느끼는 것은 여전히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리를 기억하며, 다시금 복을 주시는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공급자 하나님! 명령하시는 하나님! 바로 이 고백을 해야한다!
- 무능함과 무력함 가운데 다른 곳을 헤매지마라. 다른 곳에 기대려고 하지 마라. 내가 의지할 그 무엇을 찾으려고 발버둥치지마라. 그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천지의 여호와를 바라보라! 다시금 우리 자리를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 사람에게 다가가는 통로 ]
-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도 역시도 마찬가지다. 관계는 강함으로 묶이는 것이 아니다, 강함으로 묶이는 것은 강력해보이나, 강함이 사라질 경우 깨어지고, 흩어진다. 관계는 강함이 아니라 약함으로 묶일 때 강력해진다. 서로의 약함을 알기에, 서로의 부족함을 알기에, 그것을 함께 지탱해주고, 붙들어주는 것이다.
- 복음이 없으면 내 연약함을 드러낼 수 없어요. 내 연약함으로 다른 이들이 나를 무시하고, 손가락질하고, 인정해주지 않을 것 같은거에요. 너무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면, 내 마음 중심을 되돌아봐야해요. 복음이 아니라, 내 자아가 너무나 크게 자리잡고 있을 수도 있어요.
- 여행을 가고, 선교지를 가면, 그 피곤한 와중에도 완벽하게 셋팅하고 나오는 형제, 자매들이 있어요. 좀 부스스하게 보이면 어때요? 좀 다른 얼굴이면 어때요...완벽하게, 정확하게, 멋진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면, 내 자신이 자유하지 않아요!
- 복음공동체가 강력한 이유는 내가 죄인이며, 내가 연약하고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이해하고, 함께 지탱하고 붙들어주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강한 것은 누군가가 약하고, 누군가가 약한 것은 누군가가 강하고...서로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 순모임하면서, 내 연약함을 나누세요. 자신의 마음들을 나누세요. 잘된 것, 성공한 것을 나누면서 함께 기뻐하고, 축복해주세요. 그런데 그것만 나누면 재수없어요! 관계가 피상적이 되요. 그리고, 내 연약함과 부족함을 함께 나누세요. 내 자신의 경계를 허물어주세요. 그리고 그 이야기는 함께 비밀을 지켜주는거에요! 바로 그것이 복음의 공동체로 함께 세워져가는 모습이며, 예의이기 때문이다.
- 그러면 이런 이야기 나오지요?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면 어떻게 해요..뒷에서 뒷담화하면 어떻해요? 오히려 그런 모내 습을 싫어하면 어떻게 해요?
- 또... 내 인생 내가 지키려고 하죠~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내 인생의 공급자가 되려고 하고 있죠! 그게 살 길이 아니라는거!!
- 나의 연약함이 나눠지지 않는다면, 다시금 복음으로 돌아가야해요. 아직도 내가 나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고, 내가 창조주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도, 가장 무력하고, 무능한 모습으로 시간을 보내셨는데, 왜 여러분은 계속 힘을 주고, 강해지려고 합니까? 가장 무능하고 무력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셨는데, 뭐가 그리 두렵고 불안하십니까?
- 내 무능함과 무력함을 나눌 때, 바로 거기에서부터 연결이 되요. 마음과 마음이 연결이 되고, 관계가 만들어지고, 함께 세워져가는거에요. 복음공동체는 그렇게 세워져가는거에요!
[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무능함과 무력함 ]
- 하나님과 예수님, 요셉의 무능력과 무력함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나아올 수 있는 통로가 된다. 만약 왕궁에서 태어났다면, 목자들은 오지 못했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은 오지 못했을 것이다. 힘없는 자들은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까지도 올 수 있도록 가장 낮은 곳, 가장 더러운 곳에서 예수님의 삶은 시작되셨다!
-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시면서 먼저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겁니다. 강력한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뤄지는 것을 보여주신 겁니다.
-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왜 예수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나셔야 했을까? 말씀 7절에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다고 말한다. 곧 아기가 태어나야하는데, 이미 여관에 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이야기하고, 외면한다. 무시한다. 내 권리를 주장하며, 능력있는 사람처럼, 힘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을 것이고, 그러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계속 거절을 당했던 것이다.
- 만약 방을 예약했던 누군가가 무능함과 무력함을 선택하고, 내 방을 내어드렸다면, 내 방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거다. 나는 좀 불편하고, 번거롭고, 힘들었겠지만...바로 내 방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거다. 그것만큼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한 것이 어디있었을까! (빈방 있습니까? 덕구)
-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힘을 빼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는 겁니다. 강함과 능력이 아니라, 무력함과 무능함을 택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뤄져가는 겁니다.
[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
- 사랑하는 여러분!
- 혹시 무능함과 무력함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무능함과 무력함을 함께 하는 이들과 나누십시오. 함께 하는 이들과 나누십시다. 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생각할까, 나를 무시할까. 그런 두려움을 떠나, 나누십시오.
-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진 무능함과 무력함의 시간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이며, 다른 이들에게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시간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의 관계를 하나씩 세워가는 시간입니다!
- 그 시간을 통하여, 여러분이 여러분을 지키려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마십시오. 더 강해지려고, 더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예전처럼 나를 지키려는 방식으로, 나를 보호하려는 방식으로 반응하지 마세요. 그 길은 죽음이며, 사망이며 단절의 길이에요.
- 무능함과 무력함으로 힘들어할 때라도, 그 분을 신뢰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은 그 분이 지키시는 겁니다. 그 분이 지키시도록 나를 내어놓는 겁니다. 성령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괜찮다! 염려하지마라! 두려워하지마라! 불안해하지마라
- 지금 여러분의 무능함과 무력함의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뤄지는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제목 1)
무능함과 무력함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느끼고 있는 무능함과 무력함에 대해서 함께 고백하십시다.
하나님 저는 이런 무능함과 무력함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을 때 있고
무너질 때 있고.....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그대로 고백하십시다!!
기도제목 2)
무능함과 무력함 앞에서 내 죽음의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게 하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공급자 하나님, 명령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복음의 반응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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