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7 우리 인간의 의식이 세 단계를 거쳐 진화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의식이 없는 전인격적 단계에 있다가 자의식이 나타나나면서 인격적 단계로 진화한다. 그런데 이 두 번째 단계에서 인간은 자의식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을 경험하며 허무하게 살아간다. 그 길을 따라가면 우리의 의식은 한 번 더 진화한다. 자의식을 초월하는 초인격적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STEP 1 나, 단단한 반죽 덩어리
p.11 인간의 자의식 덕분에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와 동시에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존재와 비존재, 있다와 없다가 병존하는 상대적 세계에 들어온 것이다. 이 때부터 인간의 의식은 이원론 구조를 갖게 된다.
p.12 자의식의 특징은 자기를 대상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보는나와 보이는 나로 나눌 수 있다. 주체적 나와 객체적 나로 나눌 수 있다.
p.13 인간은 개념화라는 능력을 통해 문화라는 독특한 사회 현상을 만들어냈다. 문화는 개념화 작용에서 나온 것이다.
p.13 자살이란 주체적 자아가 대상화된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보는 나가 보이는 나를 없앨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객체화하지 않으면 죽이는 행동을 할 수 없다.
p.14 자의식이 없는 상태는 진정한 인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태어난 후 두 해 정도는 자의식이 없는 채로 산다. 자의식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간다. 그 대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자의식은 언제 발현될까? 대체로 말이 터지는 즈음으로 생각하면 된다.
p.17 자의식이 나타날 때 '아니라고 말하기 시작할 때다. 이제 자의식을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때는 한 인간이 사람이 되느냐, 마느냐의 갈림기레 있기 때문에 대단히 의미있는 시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를 하려면 반드시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한다.
p.20 인간은 자의식 덕분에 고유한 능력을 지니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능력은 시간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시간은 철저하게 자의식에서 비롯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시간 인지는 이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구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자기를 대상화하는 능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
p.22 인간이 스스로를 조작할 수 있는 까닭은 자의식으로 자신을 대상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p.31 죄를 저지른다는 행위는 말할 것도 없이 자의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자신이 없는데 누가 죄를 저지른단 말인가? 먼저 자신이 존재해야 그 자신이 자유의지를 사용해 죄를 저지를 수 있지 않겠는가?
p.32 타락이 아니라 도약이라 할 수 있다. 동물의 상태에서 인간으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p.34 자의식이 생기면서 인간이 겪을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일이다. 자의식이 생기는 순간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와 동시에 존재의 반대 개념이 비존재 개념도 알게 된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사실을 아무리 감추어도 무의식적으로는 죽음이라는 근본적 허무를 항상 느낄 수 밖에 없다.
p.36 허슬리는 금과 같은 보석을 향한 갈애를 '세속적 불멸의 추구'라고 했다. 불멸을 향한 열망이다.
p.38 성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그 순간만큼은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오로지 쾌락의 절정에 처하게 된다.
p.40 인간의 자의식은 자아 개념을 생성해내는 동시에 '내 것'이라는 개념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p.42 인간은 자의식 덕분에 사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영원히 '있음'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p.46 자의식을 제거하든지 아니면 초월하든지 해야 한다.
STEP 2 도약, 날 것에서 익힌 면으로
p.65 자의식이 있는 에고가 있는 한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단계 2에서의 삶이 이렇게 괴로운 까닭은 자아, 즉 에고가 근본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자의식은 항상 이원론의 상태로 분열되어 있어 근본적 불안 혹은 허무 상태에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에고가 처하게 되는 운명이다. 에고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소멸을 의미하는 죽음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p.67 보이는 나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개념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지 진정한 내가 아니다.
p.69 매슬로는 인생의 막바지에 여섯 번째 단계를 제안했다고 한다. 자아 초월의 욕구이다. 나를 버리고 잊어야 하는 것이다.
p.70 자의식을 초월하려면 먼저 자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일 아니겠는가?
p.73 세계종교들은 대부분 인간에게 신성이 내재해 있으며, 그것과 하나되는 것이 우리 삶의 궁극 목표라는 가르침을 준다.
p.81 영원은 시간을 초월해야 다다를 수 있는 경지다. 영원은 무시간성, 즉 시간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서서히 가서 도달하는 곳이 아니라 현재 있는 곳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STEP 3 초월, 궁극의 인생 소스
p.85 자의식의 궁극적 문제가 해결되는 마지막 목표는 궁극적 실재라 할 수 있다.
p.87 불교의 마지막 목표인 멸을 '욕심이 다 없어진 상태' 혹은 '인간의 욕망을 불어서 다 끈 상태'라고 먼저 제시한 후, 그러한 상태로 가기 위한 다음 단계로 도, 구체적으로 팔정도를 제시한 것이다.
p.87 종교만이 절대 실재에 대해 말한다는 사실이다.
p.88 불교에서는 절대 실재는 인간의 언어로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공이라는 절대 부정의 용어를 사용했다는 설명이 가장 유력한다.
p.90 '신'은 이러이러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신이 그러한 속성에 제한되기 때문이다. 어떤 유한한 것에 제한된다는 점은 신의 속성일 수 업다.
p.94 우리는 신에게 어떤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찌 되었든 신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속성이 있는 절대 실재를 말할 때는 언제나 속성이 없는 절대 실재가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신의 모든 속성은 속성이 없는, 다시 말해 아무 것도 없는 비어 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p.95 속성이 없는 실재 개념을 생각한다면 헛된 다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절대 실재란 그 어떤 속성도 없는 비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신이 하나라는 명제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니 교리 가지고 싸우고 말고 할 일이 업다. 신은 속성이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견지하면 나만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사라진다.
p.97 우리가 이원론의 세계에서 선과 악을 나누어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은 실재의 세계에 절대선이라는 개념, 혹은 선과 악이 나누어지기 이전의 선이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앞서는 선의 개념이 없으면 이원론의 세계에서는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이원론이 세계를 넘어 불이론적 실재의 세계로 가려하기 때문이다.
p.98 어떻게 하면 절대 실재를 가장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불교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우파니샤드에서 베다에 들어 있는 주술성을 극복하고 불이론의 철학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우파디샤드에서는 절대 실재를 '두번째 없는 하나라고 묘사한다.
p.100 이성적 지식으로는 결코 절대를 알 수 업다. 절대는 전체기 때문에 어떤 것도 '절대로' 절대 밖으로 나갈 수 없다.
p.102 장자에서는 전체를 '지대무외'라고 말한다. 가장 큰 것은 밖이 이으면 안된다. '지소무내' 자신 안에 들어가는 더 작은 것이 이 없다.
p.106 절대 실재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다.
p.108 영원은 시작되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법이다. 끝이 없으려면 시작도 없어야 한다.
p.109 영원의 반대 개념은 시간이다.
p.115 이처럼 시간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남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닐까 한다. 오직 현재가 있을 뿐이다. 사실 시간은 현재로서만 존재하는 것인데 우리는 기억 속에서 과거를 되살리고 미래를 생각해 과거와 미래가 존재한다고 믿어왔을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나 미래는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구고 정말 존재하는 것은 지금 뿐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을 모르는 우리는 지금 여기 있지 않고 끊임없이 과거를 생각하면서 후회하고 미래를 생각하면서 불안해한다. 몸은 지금 여기 ㅇㅆ는데 생각은 항상 과거나 미래에 가 있는 것이다.
p.116 사실 미래도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 역시 과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생각된 것은 모두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생각하는 순간 과거에 거하는 것이다. 과거가 아닌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 때문에 과거로 돌아간다. 행복해지려면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 구원이란 지금 전적으로 이 순간에 있는 것이다.
p.117 순간은 영원의 동의어다. 순간과 영원은 같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자들은 순간을 영원한 현재라고 표현했다. 영원한 것은 현재 일뿐 아무리 시간을 연장해도 영원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p.117 영원한 현재 상태에 비교적 가까이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어린 아이들이다.
p.122 보통 사람들은 현재에 있지 못하지만 깨달음을 얻었거나 그 비슷한 지경까지 간 사람들은 현재에만 존재한다. 명상을 많이 한 사람들과 일반인들의 차이는.... 뇌파.. 동일한 것을 자극
일반인 군의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들리는 소리에 익숙해져 하나의 틀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 서너 번에 걸쳐 소리를 들을 때까지는 새로운 자극이라 반응을 했지만, 똑같은 간격으로 같은 소리가 계속 들리자 반응하기를 멈춘 것이다. 십오 초만되면 같은 소리가 나느데 대해 일정한 틀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소리를 당연시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부터는 그 틀을 통해서만 반응하지 들려오는 소리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놓는 틀에 현재에 적용시킨 것이넫, 그럼으로써 그들은 지금 여기 있지 않고 과거의 생각에 머물게 되었다.
선사 군의 사람들은 달랐다. 십오초마다 울리는 똑딱 소리에 반응을 보였으니 선사들이 늘 현재를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만 있으니 이전 기억은 바로 사라지는 것이다.
늘 마음을 비워 어떤 선입견도 없이 사안을 대하는 자세가 가장 이상적이다.
p.126 절대 실재는 무시간적이기 때문에 모든 시점에 자신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항상 현재라고 하는 것이다.
p.126 불교에서는 즉심, 어떤 사건에 처했을 때 생각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즉시 떠오르는 마음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까 추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관적으로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을 말한다. 그래야 사물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다. 생각을 하는 순간 우리는 실상 즉 실제의 모습을 놓치고 만다. 생각이란 이미 과거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안경 역할을 한다고 했다. 우리의 의식에서 생각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p.129 절대 영역은 어디에 있다고 해야 할까? 역설적으로 그 영역은 바로 지금 여기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절대 실재가 모든 공간이나 장소에 존재할 수 있으려면 다시 역설적으로 이 영역이 공간 없음, 즉 무공간이어야 한다. 중심이 모든 곳에 있다는 것은 이 실재가 편재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p.131 신을 모든 곳에서 보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곳에서도 신을 보지 못한다.
p.140 우리는 절대의 세계에 가기 위해 다른 어떤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절대 영역이 아닌 곳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의 세계로 생각하는 지금 이 세계가 바로 절대의 세계다. 논리적으로 보아도 우리는 절대로 절대의 세계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니 지금 이곳이 바로 절대의 세계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 여기가 그대로 절대의 세계는 아니다. 절대는 어느 한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절대지만, 절대는 어느 한 정된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인데, 이것이 너무나 단순하고 평이한 진리라 보통 사람들은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다.
p.142 특정 상태에서 만난 신은 진정한 신이 아니다. 그 의식 상태가 사라지면 그 때 만난 신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신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신은 항상 있기 때문에 나타날 것도 사라질 것도 없다. 신은 변화된 의식 상태에서 만났다면, 그는 신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신의 이미지를 대면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때 나타난 신은 그가 조작한 이미지일 뿐이다.
p.143 깨달음이란 그러게 수련이라는 과정이나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도착하게 되는 종착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왓장이지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소에는 깨닫지 못한 상태로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달은 상태로 되는 그런 것은 없다. 지금 내가 깨달은 상태가 아니라면 어떤 노력을 하든 깨달을 수 업다. 기와가 거울이 될 수 없듯 말이다. 그런데 만일 내가 깨달았다면 그것은 깨닫지 않은 상태에서 깨달은 상태로 바뀐 것이 아니라, 원래 깨달은 상태로 있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원래부터 깨달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뿐이다. 그래서 깨닫는다. "깨닫기 위해 사실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었따" 참으로 재미있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깨닫기 위해 열심히 수행했는데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 깨달으려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니 말이다.
p.147 절대 실재를 알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달할 수 밖에 없다. 신이나 우주의식과 같은 절대 실재를 알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신이나 우주의식이 될 수 밖에 없다.
p.150 나의 현존.. 내가 있음을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절대 주체다.
p.155 도덕경에 보면 '세속 ㅏㄱ문은 더하고 더하는 것인데, 자기의 배움은 덜도 또 더는 것이다. 도를 깨닫는 일은 어떤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것들을 걷어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STEP 4 수행, 버무리며 완성하기
p.162 세가지 길은 지혜의 길(즈냐냐), 헌신(박티)의 길, 행위(카르마)의 길이 있다.
p.163 도교이 도사들이 명상을 할 때 주된 목표는 중단전의 기를 이용해 상단점의 신과 하단전의 '정'을 조화롭게 융합하는 것이다. 신. 기. 정.
p.165 가장 전형적인 종교의 길은 지혜의 길과 헌신의 길이다.
p.171 지혜의 길 1 선불교
- 조계종은 그 중심 전통을 선불교로 잡고 있다. 선 명상의 대표, 화두선. 집중만 하면 된다.
- 수행자는 생각 이전의 존재하는 원래 세상을 보게 된다.
p.179 지혜의 길 2 요가
- 요가는 결합이라는 뜻이다. 전체에서 분리된 내가 다시 전체와 결합한다는 의미이다.
- 요가수트라 : 단계별 요가 수행법 : 몸을 움직이기 전에 마음을 챙기는 것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요가는 몸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정신 수련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몸수련부터...호흡을 위해서!!
요가의 목표는 앞서 말한대로 생각을 그치게 하는데 있따.
p.200 지혜의 길 3 도교의 내단법
p.205 지혜의 길 4 수피즘의 회전춤
p.209 명상은 고정관념을 없앤다. 무엇보다도 직관적 지혜를 갖게 해준다. 이성적 능력을 제어하고 직관적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다.
p.211 우리는 외부에서 들어와 내 의식 안에 정착되어 있는 수 많은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힌 상태로 살고 있다. 내 의식 안에 자기 생각은 없다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ㅏㄷ.
p.214 명상은 외부 정보가 이렇게 입력 처리되는 과정을 일정기간 정지시켜 일상적 구성 과정을 해체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직관적 의식이 작동하는 것이다 .
p.215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인식체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이미 잘못 형성되어온 과거의 개념들을 걷어내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을 거두어내는 작업을 명상이라고 했다.
p.235 세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해 수행하다가 종교 체험을 했을 때, 그 체험이 내가 획득한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온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신이든 깨달음이든 절대 실재는 때가 됐을 때 아무 예고 없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 철저하게 저쪽에서 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수용적 자세를 하고 있어야 한다.
'Part 5 이런저런 이야기 > BOOK SUMM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가로 돌아가라 by 알리스터 맥그라스 (0) | 2020.04.06 |
---|---|
어떻게 의욕을 끌어낼 것인가 by 하이디 그랜드 할버슨 (0) | 2020.03.31 |
어떻게 말할 것인가 by 카민 갤로 (0) | 2020.03.25 |
아직도 가야 할 길 by 스캇 펙 (0) | 2020.03.24 |
상한 감정의 치유 by 데이빗 A, 씨맨즈 (0) | 2020.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