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4 주제별 이야기/존재교육 42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목적'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관심은 '나'라는 '존재'이다. 이 세상을 살면서 그 어떤 것도 나의 목적이 될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이 나를 다듬어가시는 수단이며 도구일 뿐.... 그러기에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러기에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기에 성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기에 성공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배웠느냐가 중요하다. 그러기에 doing이 중요한 게 아니라 being이 중요하다.

능력보다 상황이다-메타인지의 힘

현실이 아니라 존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존재로부터 시작해야 꿈을 꿀 수 있다. 현실은 목표가 생기지만, 존재는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꿈과 노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럴 때 새로운 인사이트가 주어진다. 창의적 인재라는 표현보다는 창의적인 상황에 들어갈 줄 아는 사람. 능력이 만드는 변수보다 상황이 바꾸는 변수가 더 크기 때문이다.

존재교육과 성품교육의 차이

그러면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이야기해야할 때가 왔다. 그렇다면 '존재교육'과 '성품교육'의 차이는 무엇일까?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성품교육'은 기독교신앙이 없어도 할 수 있지만 '존재교육'은 기독교신앙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교육이다. 다른 측면으로 이야기를 해보면 성품교육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좋은 '습관'이 교육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성품연구가 이영숙씨는 성품과 성품교육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개인의 생각, 감정, 행동이 총체적으로 표현되는 성품은, 일반적으로 좋은 성품이라는 긍정적인 개념으로 인식된다. 좋은 성품이란 "갈등과 위기 상황에서 더 좋은 생각, 더 좋은 감정, 더 좋은 행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으로 "어떠한 환경에서도 항상 옳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결단력"이다. 좋은 성품은 ..

기독교에서 '탁월함'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탁월함을 만드는 과정은 무엇일까? 바로 예수님의 삶이며,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드러난 것을 성경에서는 '성령의 열매'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3:13에서는 3가지를 이야기하며, 믿음 faith πίστις, 소망 hope ἐλπίς 사랑 love ἀγάπη 갈라디아서 5:22-23에서는 9가지를 이야기하며, 사랑 love 희락 joy χαρά 화평 peace εἰρήνη 오래참음 patience μακροθυμία 자비 kindness. χρηστότης 양선 goodness. ἀγαθωσύνη 충성 faithfulness πίστις 온유 gentleness πραΰτης 절제 self-control. ἐγκράτεια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인 존 스토트목사는 갈5:22-23의 말..

탁월한 과정은 무엇이 만드는가?

탁월함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탁월한 과정'이 '탁월한 결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탁월한 과정'은 무엇일까? 그것을 '덕'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성품'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의미의 차이가 있다고 말하지만 비슷하게 쓰인다. 플라톤은 '지성'에 초점을 두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 행동'에 초점을 둔다. 소크라테스는 이성으로 지식을 쌓고 덕을 쌓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 이성 → 眞知(진지) → 선행(덕) → 행복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지덕복' 합일설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언급한 '덕'을 조금 더 구체화시켜나간 사상가가 바로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4주덕을 말한다. 지혜+ 용기+ 절제 → 정의 지혜와 용기, 절제가 잘 조화되면 ..

탁월함은 '결과'가 아니라 '태도'이다

앞서 이야기하면서 탁월함은 '결과'가 아니라 '태도'라고 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설명하려고 한다. 물론 탁월함은 '결과'를 포함한다. 탁월한 결과가 없는데 탁월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당연히 탁월함은 '결과'로 나타난다. 그런데 탁월함이라는 '결과'에만 초점 맞추면 '과정'이 사라진다.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탁월한 '결과'를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정말 탁월한 결과가 주어진다. 하지만 한 번 탁월한 '결과'가 주어졌다고 해서 또 다시 그 '결과'를 만들 수는 없다. 왜냐하면 중간 과정에 '탁월함'이 없기 때문이다. 탁월한 과정 없이 탁월한 결과를 만들려고 하면 사람들은 부담감에 짓눌려 버린다. 또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고 한다. 탁월함은 결과로 나타나지만, 단순히 결과라고만 할..

'탁월함'이란 무엇일까?

새로운 학교에서 교육의 방향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이들을 탁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탁월함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왜 탁월함을 드러나게 해야 하느냐? '죄'로 인하여 가려졌기 때문이다. 하나님 주신 탁월함이 인간의 수고와 노력과 열심으로만 살아가게 되면서 죄의 습관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결과는 좋아보일 수 있어도 허무와 공허함에 붙들리게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 바로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탁월함이 드러나게 하려면 결국 2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죄의 습관을 제거해주면 된다. 아이들은 자신이 가진 죄의 습관을 직면하고, 그것을 넘어가고 이겨내도록 돕는 것이 필요..

존재교육이 기존교육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새로운 학교를 시작하면서 질문을 하게 된다. '기존에 학교가 많은데 또 해야하는가?' '이런 교육은 기존교육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많은 교육은 이러한 가치를 가지고 시작한다. 성품을 강조하고, 인격을 강조한다. 착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교육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구조를 넘지 못한다. 왜냐하면 교육 역시도 사회구조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좋은 학교는 자본주의의 가치가 기준이 된다. 진학률, 취업률이 중요하다. 결국 이러한 시대 속에서 살아내기 위한 것이 방편이 교육이 되었다. 그러기에 이러한 '존재교육'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존재란 관계를 통해 규정되는데, 인간으로부터 시작하게 되면 결국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존재가 규정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외부적..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존재'

새로운 학교를 시작하면서 주어진 것은 '존재교육'이다. 존재는 존재에 맞는 결과를 만든다. 그렇다면 결과가 아니라 존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뭐라고 말할까? 두 가지 측면에서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그러기에 인간은 탁월하고, 또한 탁월함에 대한 갈망함이 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계발을 하면서 몸부림을 치려고 하는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며, 탁월하고 싶어하는 목마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탁월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모든 관계를 더 풍성하게 누렸고,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

'존재'에 영향을 주는 요소

'존재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존재'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여러가지 철학적 정의가 필요하지만, 대체적으로 공통된 논의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존재'를 알아가는 것이다. '존재'라는 것은 생각, 감정, 행동으로 드러난다. 존재에 맞는 생각을 하고, 존재에 맞는 감정을 느끼고, 존재에 맞는 행동을 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생각과 감정과 행동이 '존재'를 형성한다. 생각이.. 감정이.. 행동이.. 존재를 더 강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가 변하려면 생각, 감정,행동이 바뀌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감정은 그 자체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고 현재까지는 약물로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변화는 생각을 통해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주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