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3 말씀이야기/성경과 인문학

[BOOK] 그리스도교, 역사와 만나다

꿈꾸는꼬목사 2021. 7. 8. 10:41

들어가며
12 그리스도교 이야기는 그저 서양 문명이 낳은 한 종교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서양 문명 자체의 이야기다.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자라나며 꽃을 피운 문화들, 그 문화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치는 그 문화를 처음 싹틔운 신앙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헤어릴 수 없다. 겉보기에 그리스도가 점차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는 지역에서조차 그리스도교의 인간 이해는 사람들의 상상과 욕망을 가장 깊은 수준에서 끊임없이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과 타인에게 어떠한 윤리적 기대를 품어야 하는지 결정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더 잘 알아야 하는 이유는 이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

14 가장 진정한 그리스도교 이야기는 오직 신앙인들의 마음과 생각을 통해 펼쳐지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움직임은 부분적으로나마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다. 

01 영광의 백성 : 이스라엘
히브리 성서가 전하는 하나의 위대한 이야기는 있다. 하느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임했다는 것. 히브리 성서는 바로 이를 노래하는 대서사시다. 유대교 전통에서는 이러한 영광을 '세키나'라고 불렀다. 
BC 586 남유다 멸망
BC 516-515 성전재건
BC 323 알렉산더 대왕 페르시아 정보
BC 198 셀레오코스 왕조가 이스라엘을 정복
BC 142 하스몬 왕조
BC 63 로마에 의해 정복

02 예수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인간들 가운데 머무는 방식을 완전히 다르게 바꾸어 놓았다. 하나님은 경이롭고 다가갈 수 없는 셰키나로 머무시지 않는다. 오히려 구체적인 존재, 다시 말해 살아 있는 인간이 되어 우리 곁으로 다가오신다.

28 초대 그리스두교인들은 지상에 임하는 하느님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정점에 도달했다고 믿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광채는 인간의 본성에 닿았고, 그 결과 온 인류가 하느님의 현존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고 그들은 확신했다.

34 더 놀라운 것은 예수가 제시한 하느님 나라의 모습과 범위다. 당시 사회가 가장 경멸하던 이들과 더불어 먹고 마실 것을 요구했다. 바로 그것이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자 이상이었다.

03 메시아의 죽음
37 성서는 예수의 말과 행도엥 담긴 권위와 권능에 관한 물음을 던진다. 그 권능과 권위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서..

39 예수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적의를 사게 된 원인은 그의 대담한 율법 해석에 있었다.

46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것이 시작이ㅓㅇㅆ다.

04 이제 기뻐하라
50 당대의 메시아 운동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끝나고 말았다.

52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품고 있는 하나의 공통된 전승이 있다. 여자들이 빈 무덤을 가장 먼저 발견했고, 이 사실을 남자들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53 그리스도의 몸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 지평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정복했다. 그 전까지 인류를 죄와 죽음, 악에 사로잡히게 했던 모든 권세가 결정적으로 정복되었다는 사실이다.

56 사도들은 그저 스승의 활동을 이어가면서 종교적인 가르침을 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제 기뻐하라"라는 부활의 선언은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이를 선언하며 여생을 보냈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부인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내놓았따는 사실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 전무후무한 대 사건이었음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조심스럽게 예수의 부활 사건을 살펴보자면, 제자들이 어떤 공통 경험을 했고, 이로 인해 예수의 삶과 죽음의 의미는 물론 지상에서의 그의 현존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경험은 제자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이해조차 철저하게 바꾸었다. 분명 어떤 경이롭고 전례없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05 사도들의 교회
64 바울은 그저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유대교 율법을 면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집착 자체가 복음에 충실하지 못한 행위라고 여겼다.

65 복음은 심지어 가장 중요한 차이인 아브라함의 자녀들과 모세의 율법 바깥에 있는 이들 사이에 놓인 장벽마저 헐어버렸다고 교회는 믿었다. 

06 초대 교회의 성장
69 그리스도인드에게는 예배할 장소가 없었기에, 그들은 각자의 사적 공간에서 모였다.

70 예루살렘에 세워진 첫 교회와의 역사적 연속성을 지켜나가면서 신학적, 도덕적으로 올바른 방향성을 잃지 않도록 돌보는 일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첫 세개가 지나가자 사람들은 주교의 역할이 교회의 일치와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둔 불완전한 안전장치였다. 그러면서 주교의 분열이 이러안고, 3세기 중반, 로마 주교 스테파누스는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부여한 권위가 로마 주교에게 영적으로 계승되고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75 초기 그리스도교는 형식상 일종의 비교였다. 끊임없이 구설에 시달렸지만.... 제국 안에서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자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의 모습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러한 모습이 그리스됴교인들이 전하던 복음의 설득력을 결정적으로 강화했다.

07 순교자의 시대
81 그리스도인에 대한 조직적인 첫 박해는 64년 로마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이 더는 법률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선례로 남았고, 로마의 황제와 신들에게 적절한 종교적 경의를 표하지 않는 것이 범죄이며, 시민의 의무를 저버리는 박역 행위로 치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86 더 중요한 사실은 위협에 굴복하여 적잖으 배교자가 나타났음에도, 대다수 그리스도교인의 신앙은 고난을 통해 더욱 더 굳건해졌다는 것이다.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의 신학자이자 테르툴리아누스. "그대들이 우리를 베면 벨수록 우리는 더욱 더 자라난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인의 씨앗이기에"

08 영지주의
89 영지주의라는 이름은 그노시스, 즉 비밀스러운 종교적 지식으 통해 계몽된 이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는 그들의 주장에서 나온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인 대다수에게 감추어져 있는,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특별한 정승을 알고 있다고 자처했다. 

90 오늘날의 뉴에이지 영성에 가까다. 

90 첫 영지주의자, 영지주의의 선구자로 볼 수 있는 인물은 시몬 마고스, 즉 마술사 시몬이다. 

93 그들이 말하는 구원은 극소수만을 위한 것이며, 여성이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영지주의는 대개 인간 본성을 소마, 프쉐케, 프네우마의 세가지 요소로 구분하여 이해했다. 

09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교회
101 2세기 중엽, 최초의 그리스도교 고등교육기관이 설립된 곳도 바로 알렉산드리아였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스토아 학파 철학자 판타이노스가 설립한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 학교'가 바로 그것이다. 그게 이어 클레멘스, 오리게네스가 교리문답 학교를 이끌었다.

10 그리스도교 세계의 탄생 : 콘스탄티누스 대제
109 303년, 교회에 대한 최후의 박해, 가장 끔찍한 박해가 황제의 주도하에 일어났다. 바로 동부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 311년 갈레리우스는 중병에 걸려 괴로워하던 중 이를 그리스도교 신의 복수라고 생각ㄱ했고,... 312년 겨울, 박해는 사실상 종식되었다.

111 313년 밀라노칙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완전한 신앙의 자유와 법률적 권리를 보장했다. 330년에는 비잔티움으로 천도했다. 훗날 콘스타틴누스의 도시, 콘스탄틴노플이라고 불리게 될 '새 로마'는 옛 로마와는 달리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봉헌된 도시였다. 

114 콘스탄티누스의 조카 율리아누스는 비밀리에 옛 다신교로 개종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

11 사막의 도시 : 수도원 운동의 시작
109 그리스도교 최초의 은수자들은 3세기 후반 이집트에서 나타났다.

121 최초의 사막 교부들은 홀로 수도자의 삶을 살며 영적 가르침을 실천했다. 이집트의 성 안토니우스는 이러한 삶의 모범이었다. 

122 안토니오스에 이어 수도운동을 이끈 중요한 인물은 군인 출신으로 수도자가 된 성 파호미오스(파코미우스)가 있다. 그는 314년경 사막으로 떠나 규율에 따른 공주 수도 생활을 도입한다. 파코미우스의 수도 규칙은 이후 동방의 성 대 바실레이오스와 서방의 성 베네투스 수도 규칙의 모범이 되었다.

122 안토니오스 못지 않게 존경받았고, 그리스도교 관상 새왈의 발전에서 더 중요한 인물은 성 대 마카리오스다. 30세의 나이에 수도자의 삶을 택한 그는 곧 위대한 영적 지도자이자 스승, 치유자, 예언자로 존경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무엇보다 신비주의 신학자였다.

125 에바그리오스 폰티코스, 곧 폰토스의 에바그리오스는 사막 교부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학자였다. 이단으로 규정되면서 다시 사라졌다.

12 아르메니아와 인도의 그리스도교
129 그리스도교 국가, 곧 대다수 거주민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할 뿐 아니라 국교가 그리스도교이거나 그리스도교였던 국가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은 아르메니아다. 300년경 아르메니아 왕가가 세례를 받은 후 아르메니아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아르메니아 그리스도교를 독특한 제도와 구조를 갖춘 국교로 수립한 실질적인 공헌을 한 인물은 계몽자 성 그리고르(240-332)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후, 다른 '오리엔트 교회들'과 함께 아르메니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과 로마의 제국교회와 상통 관계를 단절했고, 506년에는 이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 분열로 인해 아르메니아 그리스도교는 고립된다. 7세기, 아르메니아가 이슬람 세력에 정복되지 교회는 더욱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133 인도의 그리스도교 또한 아르메니아 그리스도교 못지 않은 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홍해 무역로를 따라 이동하다 정착한 동시리아 무역상들의 후손이었다. 52년 사도 토마가 케랄라 복음을 전했다고 믿는다. 전승에 따라면 사도 토마는 인도에선교활동을 하 72년경 마드라스의 마일라포어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특히 힌두교 관습이 토마 계열 그리스도교인들이 신심에 스며들었다. 수 많은 그리스도교인이 고대 힌두교 관습을 따라 64세가 되면 출가하여 관상과 기도로 여생을 보내곤 했다.

13 고대의 경이 : 에티오피아의 그리스도교
139 에티오피아 정교회... 터와흐도(교회)

140 고대 에티오피아에 그리스도교 문명이 전해질 수 있었던 계기는 4세기 초, 튀로스 출신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자라난 상인 프루멘티우스와 아이데시우스 형제가 인도로 향하는 무역선이 난파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왕세자 에자나스에게 신앙을 소개하고, 가족들은 개종한다. 

142 480년경 조직화된 수도원생활의 도입이다. 9성인으로 부르는 이방 수사들은 에티오피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특히 중요하다. 5세기 후반의 수사들은 에티오피아에 잔존하던 옛 이교의 흔적 대부분을 지우는데 성공했다. 그 자리에는 통일되고 매우 강렬한 그리스도교 문화가 자라났다.

14 삼위일체 하느님 : 최초의 공의회들
149 신학적 논의는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에야 비로소 마련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으로 교리 문제를 공개적으로, 또한 엄밀히 토론할 수 있게 되자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에서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53 제국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일치를 이루어야 했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첫 '보편공의회'가 325년에 소집되었다. 주교 318년은 콘스타티노플 인근 니케아에 모였고, 이 자리에 아리우스도 참석했다.

156 아리우스 논쟁이 종결된 것은 니케아 그리스도교를 지지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동방의 지배권을 확린한 379년에 이르러서였다. 하지만 키아샤라의 대 바실레이오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명료한 신학을 전개하면서 381년 두번째 개최된 공의회, 제 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최종적으로 채택한 니케아 신경으로 열매를 맺었다.

15 교부들의 시대
159 그리스도교 역사의 첫 몇 세기를 흔히 교부 시대라고 한다. 교부들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처음으로 성서를 주해하는 원칙을 세웠고,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정제된 언어를 확립했다. 또 그리스 철학의 방법론과 풍요로움을 차용하여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것을 보다 깊이 있고 분명하게 이해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159 정밀하게 정의된 교리에 갇힌 후대의 신학자들은 결코 교부들과 같은 대담한 고찰을 시도할 수 없었다. 폭넓은 지적 자유로움 안에서 꽃핀 교부들의 사상은 독창적으로 가득하고, 후대의 신학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생생함과 현장감이 무더 있다.

16 로마의 멸망
169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고자 결정하기 전부터, 제국의 서방은 이미 오랜 시간 쇠락하고 있었다. 이미 황제는 로마 시를 떠난 지 오래였다. 서방 제국 최후의 황궁은 라벤나에 있었다.

172 로마의 함락은 800년만에 일어난... 엄청난 상징성. 로마가 옛 신들을 저버렸기 때문에 쇠토한 것이라고 믿으면서 신국론을 집필.

173 서고트조근 교회에 피해를 주지 않고자 애썼다. 이들 또한 그리스도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울필라스였다. 

175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퇴위시키고 이탈리아의 왕을 자처했다. 메로빙왕조 -> 카를루스 왕조는 로마 이후 중세를 거쳐 근대 초기까지 이르게 될 강대한 유럽 제국을 형성했다.

17 서유럽의 수도원 운동과 고전 학문의 보존
177 암흑시대는 에드워드 기번에게서 나온 신화다. 오히려 서유럽의 수도원 운동이 아니었다면 고전고대의 라틴어 유산은 로마 제국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177 그리스도교 수도원 운동은 본래 동방의 사막에서 시작했다. 

179 진정한 의미에서 서방의 독자적인 수도원 전통을 창시한 인물은 성 베네딕트이다. 

183 수도원은 동방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는 당연시되던 문명의 이기에서 점차 떨어져 나가고,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도 희미해진 서방 교회가 고전고대 문화와 연결될 수 있게 해준 고리였다. .. 문화적으로 황폐해진 서방에서, 고전학문과 문학을 보존하는 일은 수사들의 몫으로 남았다.

184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상실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산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보잘 것 없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희미해져 가는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고자 분투했던 그리스도교인들의 학문 활동이 없었다면, 이른바 암흑시대는 실제로 영원한 심연에 빠져들고 말았을 것이다. 

18 그리스도교 세계의 등장
187 서유럽에서 로마의 옛 질서는 종적을 감추었다. 로마의 폐허에는 그리스도교 유럽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태동한다. 옛 로마인의 영토에는 만족 왕국들이 들어섰다. 라틴인의 후손들은 이제 게르만 지배자를 섬기는 처지가 되었다. 

188 5세기 말에 접어들면 교회와 수도원만이 갈리아 최후의 문화적 보루로 남게 된다.

19 정통 그리스도교의 형성
197 4세기 주된 교리 논쟁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것이었다. 한편 5세기 이후의 교리 논쟁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두고 벌어졌다. 

202 칼케도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의 일치라는 이상은 붕괴되고 말았다. 단성론 계열 교회들....오늘날 이들 교회는 '오리엔트 정교회'라는 집단 용어로 지칭되곤 한다.  그리스도론 논쟁의 커다란 비극은 교회 분열의 원인이 믿음 자체보다는 언어에 있었다는 것이다 .

20 통일 그리스도교 제국의 마지막 꿈
205 6세기 초, 로마 제국의 서방은 존재하지 않았다. 옛 로마 문명의 희미한 그림자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6세기를 거치며 옛 그리스도교 로마세계는 잠시나마 다시 통일을 이루었다. 비잔티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483-565), 황후 테오도라가 남긴 업적이었다.

205 유스티니아누스의 집안은 본래 일리리아의 농부였다. 황후는 전차 경기장 곰 조련사이 딸이다. 유스티누스가 세상을 떠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단독 황제로 통치하게 된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창조적이고 눈부신 치세는 테오도라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8 유스티니아누스의 가장 큰 군사적 열망은 서방 영토를 수복하고 가톨릭 그리스도교인들을 만족 치하에서 , 무엇보다 아리우스파 이단자들의 지배에서 해방하는 것이었다. 

210 529년 로마 법률을 성문화환 유스티니아누스 법적이 편찬되었다. 

212 유스티니아누스의 치세를 수 놓은 거대한 공공 건축물은 하기야 소피아. 솔로몬! 내가 당신을 이겼소!

21 '동방의 교회' 네스토리우스파 이야기
215 중세 초, 가장 커다란, 적어도 가장 넓게 퍼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동방의 교회라고 불린,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였다.

216 동방 네스토리우스파는 곧 독자적인 그리스도교 세계로 부상했다. 498녀 ㄴ니시비스의 주교 '동방 초대주교라는 호칭을 채택했다. 오리엔트 교회에는 서유럽과 비잔티움 교회와 필적할 만한 독자적인 체계가 자리 잡았다. 아시아 전역까지 누비녀 중국선교까지 635년에 감당핸다. 

219 1625년에 781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경교라고 불리던 중국 그리스도교의 역사. 금석문에 따르면 당 태동이 처음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인 페르시아 수사를 접견한 뒤 설교를 허락했으ㅕ, 638년에는 수도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윤허했다고 한다. 이후 200년 동안 여러 교회와 수도원이 적어도 10개 도에 설립되었다. 

221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와 관음 '여신'. 불교 전통에서 여성을 구원자로 숭배하는 일은 낯설다.

 

 

불국사의 돌 십자가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돌 십자가(24.5cm*24cm*9cm) 1956년 한창 경주에서는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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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아기 안은 불상 만들어성모상으로 두고 기도마리아 관음고토(五島), 소토메(外海) 지방의 잠복 기리시탄들은 겉으로는 불교신도가 되어 절에 다녔다. 거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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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새로운 힘 : 이스람 세계의 등장
225 7세기가 시작할 무렵까지 수백 년간 그리스도교 세계는 사실상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 확장의 시대를 누렸다. 그 결과 여러 형태의 그리스ㅗ교 공동체가 여러 지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슬람에 압도되기 시작한다.

228 762년 이후 칼리파 제국의 수도가 된 바그다드가 전성기의 알렉산드리아나 로마에 버금가는 찬란함을 구가했다. 

229 그럼에도 이슬람 제국이 흡수한 모든 문명의 종합을 이룩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슬람 세계는 그리스, 시리아, 페르시아, 칼데아, 북아프리카는 물론 인도와 그 너머의 수 많은 문명을 받아들이고 이를 융합했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을 그대로 흡수함으로써 이슬람 제국은 중동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페르시아 학문과 의학의 유산 전체를 물려받았다. 그 결과 이슬람 세계의 과학과 학문은 9세기 말부터 13세기 중반까지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를 완전히 압도했고, 비잔티움에 버금가는 성과를 이룩했다....

230 이슬람의 발흥 이전 시리아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의 의학, 과학, 철학적 지혜를 먼 동방으로 가져왔고,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 기술 문헌들을 그들의 언어, 곧 셈어로 번역했다..... 칼리파 제국이 들어섰을 때,  고대 그리스도와 로마가 이룩한 성과들을 이슬람 문화로 전수한 첫 세대는 바로 시리아 그리스도교 학자들이었다... 칼리파 제국이 바그다드로 천도한 후, 지혜의 집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도서고나 겸 학술기관이 설립되었고, 주로 시리아 그리스도교인들이 그곳을 관리했다....바그다드.. 정확히는 지혜의 집에서 번역된 광대한 문헌들은 스페인을 비롯한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23 카롤루스 대제
233 압바수 왕조의 위대한 이슬람 문명이 찬란한 꽃을 피우던 무렵, 바로 프랑크인들의 제국, 카롤류스 마뉴스, 샤를마뉴, 칼 대제가 창립한 카롤루스 제국이 등장한다. 

237 800년 성탄절, 로마인들의 '자발적' 환호에 힘입어 교황 레오 3세는 카롤루스에게 황제의 관을 수여했다. 법률적으로 교황의 행위는 그저 상징적인 것에 불과했다. 교황에게는 황제를 추대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오가 남긴 선례는 훗날 서유럽의 새로운 제국, 신성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다. 

238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은 새로운 그리스도교 질서,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가 등장한 것이다. 카롤로스 대제 이후, 서방과 동방 로마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이제 동방과 서방의 그리스도 세계가 각자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24 하느님의 얼굴 : 성상 파괴논쟁
243 성상은 정교회의 필수 요소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동방 제국의 교회와 가정에서 성상을 사용하는 관행은 8세기 초에 이미 대중화되어 있었다. 레온 3세는 730년에는 공식적으로 성상사용을 금지했다. .

248 여제 이리니(752-803)는 성상 복고를 주도한다.....파괴에 대항해서 결정적 복고는 테오도라가 섭정이 되었따. 843년에 이콘사용을 확정.

25 프랑크와 비잔티움 : 깊어지는 골
253 9세기에 서방은 카롤루스 대제의 정치 개혁과 '카롤루스 왕조 드네상스'로 새로운 도약의 시대를 맞이했다. 마찬가지로 예술과 학문의 신선한 부흥이 비잔티움 세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255 동방과 서방 교회가 서로를 낯설게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드러낸 사건은 이른바 필리오케 논쟁이었다. 

256 로마에서 처음으로 필리오퀘가 들어간 신경을 채택한 시기는 101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의 대관식 때였다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26 슬라브인들의 개종
261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중 어떤 교회가 이탈리아 남부 칼리브리아와 발칸 반도에 대한 권한을 행사할 것인지를 두고 불거졌다. 어떤 지역에 대한 관할권은 곧 그 지역에 대한 정치적 권한을 의미했기 때문에.....9세기 슬라브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에 따라 관할권 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게다가 마치 포티오스가 콘스타티노플 총대주교로 임명된 사건은 동방과 서방 관계를 악화일로로 치닫게 했다.

262 슬라브 세게로 파견된 선교사들 대표인물은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 (820-884 가량) 

265 러시아는 10세기 말(전승에 따르면 988년)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다...988년 블라디미르가 콘스탄니노플 황제 2세 바실릴오스 2세에게 결혼요청... 정교회는 그를 성인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으로.

2691240년 키예프가 몽골군에 함락되었고, 거주민들은 학살당했다. 이후 러시아 그리스도교 중심지는 몽골의 말발굽이 닿지 ㅇ낳은 곳이었으나 확연히 덜 문화되니 북쪽의 한 도시로 이동했다. 모스크바였다.

27 대분열
271 비잔티움 동방과 라틴 서방은 11세기를 거치며 사실상 완전히 결별했다. 공식적으로 대분열의 해는 1054년이다.

273 이탈리아 남부를 휩쓴 노르만인들은 교황 레오에게도 골칫거리였는데,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받지 못하고, 1053년 6월 아홉달 동안 인질로 잡혀있었다. 석방된 레오는 콘스탄티노플에 사절을 보내 비잔티움과의 동맹 가능성을 타진했다. 황제가 도와주려고 하자, 총대주교 미할일 케룰랄리오스가 황제의 계획을 막고 나섰다. 

276 1054년 7얼 16일 금요일 성찬예배를 거행하던 하기야 소피아 성당에 들이닥쳐 케룰라리오스와 콘스탄티노플 성직자들을 '파문'하는 교서를 제대로 올려놓았다.

28 초기 십자군
281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제 1차 십자군 원정을 촉구한 클레르몽 공의회에서는 '하나님의 휴전'을 재차 강조하며 확장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후전'을 뒷받침하던 핵심 사상은 폭력과 약탈 행위로부터 방어력이 없는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었고, 우르바누스의 호소는 동방에서 들려온 소식 곧 셀주크 투르크가 동방의 그리스도교인은 물론 성지를 방문하는 서방 그리스도 교인들을 약탈하고 살해하며 노예로 삼는다는 소문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이어싿.

287 십자군의 의도와는 달리 원정은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와 동방 문명의 문화 및 무역관계를 오히려 안정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이로써 동방과 서방 사이의 생산적인 문화적, 지적교류가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29 비잔티움의 영광과 몰락
294 비잔티움 르네상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일종의 영적 각성이었다. 주목해야 할 인물은 신학자 시메온이다. 그는 사실상 동방정교회 영성의 근간이 되었다. 동방 교회에 이 칭호가 부여된 인물은 세 사람이다. 사도 요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수, 그리고 시메온 뿐이다. 그의 이름은 게오르기오스이다 .

296 여기에 미하일 프셀로스. 그리스도교 플라톤주의의 발흥을 이끌었다. 프셀로스를 중심으로 시작된 플라톤주의의 부흥은 중세 후기 비잔티움의 지적 문화를 주도했고, 궁극적으로 르네상스 서유럽에서 플라톤 철학의 부흥을 이끌게 된다. 

301그리스인들과 라틴인들 사이의 갈등과 증오는 제 4차 십자군 원정이라는 비극에서 정점에 달한다. 콘스탄티노플은 십자군의 약탈레 1261년까지 의세의 지배를 받았고, 라틴인 '총대주교'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를 관할했다. 동방과 서방의 암금과 증오는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30 신성 로마제국
303 서로마 황제가 폐위된 476년에서 가롤루스 대제 이전까지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권력자는 서방에 없었다. 오직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만이 유일한 황제였다. 

304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는 13세기경 만들어졌으나 제국 자체는 800년 성탄절 로마에서 거행된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을 통해 성립되었다. 

306 젊고 혈기 왕성한 오토 3세는 이 새로운 로마제국의 호아제로서 진지하게 고대 로마제국을 복원할 포부를 품었던 인물이다.

307 1157년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 1세는 신성제국이라는 국호를 채택하며 제위의 신성함을 암시하고자 했다. 

310 제국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 것은 1273년 새 왕조, 합스부르크 가문 아래서다.

31 중세 성기
313 그리스도교 역사의 첫 천년 동안 모든 혜택을 누린 것은 옛 로마의 동방 비잔티움이었다.  그러나 11세기를 기점으로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는 전례 없는 성장을 경험했다. 11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를 흔히 중세 성기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비잔티움과 이슬람 동방과의 접촉이 늘어나며 촉진된) 창의적인 문화 도약의 시대였다. 인구 또한 증가했고 경제가 발전해쓰며, 각지에서 도시가 성장했다.

314 대성당, 병원, 대학이 설립되었다.
중세의 대학은 근본적으로 교회와 연결되어 있었고, 교황이나 지역 군주의 인가를 받아 설립되었다.

32 이성과 미신 : 중세의 두 얼굴
323 13세기와 14세기, 중세 서구 문명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지식인들은 이성의 권위를 한껏 추앙했다. 동시에 이 시대는 정치, 사회면에서 끔직한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325 13세기는 여러 영적, 지적 운동의 시대였다. 사실 이 두 가지는 하나로 결합된 것으로, 훗날 서방 그리스도교의 사상과 신심에 커다란 흔적을 남기게 된다. 13세기에 형성된 대표적인 두 수도회,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쿠스회는 각기 고유한 신학적, 철학적 사유의 전통을 이어가며 훗날 가톨릭 신학을 선도한다.

325 프란치스코회... 성 보나벤투라

327 도미니쿠스회..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

329 중세 후기의 두드러진 측면 가운데 하나는 마법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음이 곳곳에서 생겨난 것이다. 광적으로 마녀사냥에 나선 시대는 근대 초, 특히 16세기와 17세기였다. 게다가 '마녀'들을 박해하고 단죄한 것은 교회 법적이 아닌 세속 법정이었다.... .16세기 이후 근대 초기 사회를 뒤흔든 히스테리적 마녀사냥에서 마녀재판을 막으려고 한 것은 언제나 교회였다.

331 흑사병...1347년 아시아..1349년 유럽. 1350 유럽 최북단까지

33 중세 후기 오리엔트 교회들
333 십자가의 도래는 동방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는 그들의 운명을 뒤바꾸기도 했다

334 아르메이아

335 콥트 교회

336 에티오피아. 1189년 1229년 솔로몬 왕조가 탄생.

341 동시리아교회. 중세 후기 가장 어려움을 겪은 것은 동시리아 교회 곧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이다.

34 비잔티움의 황혼
351 동방 그리스도교가 간직해 온 신비주의 영성 전통이 새롭게 주목받은 시기도 팔레올로고스 왕조시대다. 특히 헤지카즘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형태의 관상 기도가 이를 대표했다.

35 최후의 황제
355 콘스탄티노플은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 도시이자 헬레니즘 문화의 마지막 보루였다.

356 1439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비롯한 700여명의 대표단과 함께 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한 황제는 비잔티움 교회가 로마 교황에게 복종하는 형식으로 로마 교회와 연합하는 안에 동의했다.

358 1452년 하기야 소피아에서 공개적으로 교회 연합을 기념하는 파틴전례와 동방 전례를 동시에 거행함으로써 동서방의 일치를 재확인하기도 했다. 

359 1453년 4월 멸망.

36 르네상스 그리스도교 사상
365 서유럽 르네상스는 동방 비잔티움 문명의 유산에 빚진 것이었다.

366 중세 문명의 찬란한 문학적 성과로 손꼽히는 단테의 신곡은 형식에 있어 대단히 혁신적인 것으로, 중세 문학보다는 고전고대의 문학 형식에 휠씬 더 큰 영감을 받았다. 또 조토는 방법과 표현 기법 모두에서 중세 후기 이탈리 회회의 혁명을 이끌었다.

367 르네상스 초기의 가장 위대하고 창의적인 사상가 중 한 명을 꼽히는 추기경 쿠사의 니콜라우스 곧 니콜라우스 쿠사누스는 피렌체 공의회가 시작할 무렵 교황 대사로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해 비잔티움의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학문을 직접 접한 최초의 서방인이었다.

367 르네상스가 비잔티움 제국 마지막 나날에 유입된 비잔티움 학문에 의해 촉지되었다는 점에서.... 플라톤주의 철학자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 메디치의 주도로 '플라톤 아카데이마'라는 결실을 맺는다.

369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학문의 중심은 단연코 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아였다.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콘토르디아 백작 조반비 피코 델라 미란돌라.

37 스페인과 이단신문
375 1492년 이베리아 반도 최후의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가 멸망하며 가톨릭 국가 스페인이 탄생한다. 스페인은 그리스도교인, 유대인, 무슬림이 어울러지며 지냈던, 유럽에서 가장 다양한 색채를 띤 곳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통일 왕국ㅇ르 꿈꾸던 페르디나는트의 야망은 결국 종교의 일치를 강요하는 정책으로 나타났다. 페르디난트가 도입하 무기는 이단심문이었다.

380 새로운 인종주의를 배격한 몇몇 스페인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성 로욜라의 이냐시오이다. 1534년 파리에서 예수회를 조직하고, 1537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1540년에 교황의 인가를 받았다. 

38 종교개혁
383 개혁이 필요하다는 외침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한 세기 전부터 울려 퍼졌다. 잉글랜드의 존 위클리프(1330-1384), 보헤미야의 얀 후스(1370-1415).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유럽에서 근대 민족 국가가 탄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각국 군주들은 서로 자신이 절대 권력을 가지며 자신의 국가에 불가침한 주권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39 종교개혁의 전개
394 독일 종교개혁
396 스위스 종교개혁 : 츠빙글리, 장 칼뱅

40 재세례파와 가톨릭 종교개혁
403 루터교회와 개혁교회가 종교개혁의 '넓은 중도'를 형성했다면, 이를 기준으로 이른바 '좌파'라고 할 수 있는 급진 프로테스탄트와' 우파'라고 할 수 있는 가톨릭 교회 내 개혁운동이 있었다.

404 스위스 형제단
콘라트 그레벨 -> 발타자르 후브마이어 -> 멜키오르 호프만

409 카톨릭 종교개혁
에라스무스, 토머스 무어

411 교회 개혁의 과업을 일구어낸 실질적인 힘은 수도자들에게서 나옸다. 새로운 수도회들과 기존 수도회의 갱신은 16세기 가톨릭 세계의 신앙적 재생을 가능케 한 핵심 원동력이었다.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나 위대한 스페인 가르멜회 신비주의자 산 후안 데 라 ㅋ크루스, 예수회의 영적 작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등은 모두 이러한 영적 갱신이 낳은 인물들이다. 나아가 이러한 부흥의 흐름은 해외 선교에 향한 열정에 불을 지핌으로써 근대 로마 가톨릭 교회를 온 세계로 확장하는데 기여했다. 

411 한편 로마 교회 제도의 전면적인 갱신은 1545년 교황 바오로 3세의 트리엔트 공의회 개최와 함께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