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양(朴瑞陽, 1885년~1940년, 대한제국의 최초의 외과의사, 화학자, 교육자, 독립운동가)
한국의 최초의 외과의사인 박서양의 본명은 봉출이었습니다. 서울 종로에서 백정 박성춘(朴成春 1862∼1933)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백정은 가업이었고 봉출도 백정의 삶을 살게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들은 좀 다르게 살기를 바란 아버지 박성춘의 마음을 따라 1894년 무어 선교사가 설립, 운영하던 곤당골 교회 부속 예수학당에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는 것을 허락한 것은 아니었고 공부를 시키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들 박성춘과 박서양 가족의 생애에 가장 영향을 크게 끼친 분이 바로 무어 선교사였습니다.
새뮤얼 F. 무어(Samuel F. Moore, 모삼열 牟三悅 1860∼1906)
그리고 이들의 마음에 감명을 주고 생명을 구원해주었던 고종황제의 주치의가 바로 에비슨 선교사였습니다.
고종황제의 주치의였던 의료선교사 에비슨 (Oliver R. Avison, '어비신'魚丕信 1860~1956,영국출신, 캐나다)
의료 선교사 에비슨은 영국 출신으로서 캐나다로 어린 시절 가게 되었고 의학을 공부하다가 1893년 미국 북장로회에서 의료선교사로 임명받고 한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당시 의료기술로 최고였던 제중원 원장을 지내며 미국의 사업가 세브란스씨에게 받은 기부금으로 세브란스병원)을 짓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세우는 등 의료원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왕의 주치의가 백정을 치유해주다!
그런데 고종의 주치의였던 에비슨이 한낱 백정에 불과했던 박성춘을 찾아와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감동이 있었습니다. 박성춘은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로구나하는 감동으로 그 에비슨을 설득하여 인도한 무어목사님의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박성춘은 몸이 치료된 1895년에 무어목사가 이끌던 소공동 부근의 곤당골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복음에 대한 감격으로 사람들을 열심히 전도하는데 주로 백정들이 많았고 그러다보니 먼저 교회를 다니던 양반쪽에서 백정들을 거북하게 생각하고 출입금지를 요구했으나 무어목사님의 소신은 분명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양반교인들은 홍문수골 교회라는 곳으로 따로 분립해 나갔습니다. 무어목사님은 분명하게 거룩한 믿음의 소신을 지켰고 그것이 감동이 되었습니다.
나중 두 교회는 다시 연합하여 1905년 종로구 인사동으로 교회를 옮기고 양반과 천민이 함께 승리하는 교회가 되자하여 승동교회(勝洞敎會)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복음전파에 힘쓰던 박성춘은 백정제도 폐지를 위한 용기를 가지게 되고 에비슨과 무어와 함께 수차례 탄원서를 올려 드디어 고종황제의 허락이 떨어져 1896년 2월 백정(屠漢)들에게도 면천(免賤)이 허용되어 평민들과 같이 갓[漆笠]을 착용할 수 있었고 호적에 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교회사에서 가장 기록할만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링컨이 흑인을 해방시킨 것만큼의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후 박성춘은 더욱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커지게 되어 수많은 인물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아마 그의 일생에 가장 빛나는 연설을 하게 됩니다.
<국가 역사책에 기록된 박성춘의 민민공동회 연설> 『대한계년사』권3, 고종 광무 2년 무술(지11월)
1898년(고종 35년) 박성춘은 지도적 능력과 역량을 인정받아 10월 28일에서 11월 2일까지 서울 종로에서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 공동회의에 모인 수많은 군중 앞에서 중에서 애국 연설을 하며 6가지를 헌의한 것이 국가기록에 지금도 남아있는데 그의 연설문을 보면 대단한 열정과 비전과 시야를 가진 애국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도 박성춘은 서재필, 윤치호, 박정양, 유길준,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한성부지역의 간부로 활동했습니다.
나중 박성춘은 1911년 12월에 한국 최초로 백정 출신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3년후 대원군의 친척으로 왕족이었던 이재형도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승동교회는 안디옥교회처럼 왕족, 양반, 백정이 명실상부 예수 그리스도의 한 지체를 이루는 ‘차별 없는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절대 차별하지 않는다는 굳은 믿음으로 나아갔던 무어 선교사의 열정과 박성춘의 믿음이 교회를 교회되게 만들었습니다.
<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
오래전 텔레비전 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으로 많은 이들이 알게된 박서양은 아버지를 치유해준 에비슨 선교사의 지원 등으로 제중원 의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1회 졸업생이 되었고 졸업 후 오성학교, 중앙학교, 휘문학교 등에서 화학과 물리 과목을 가르쳤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오래전 텔레비전 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으로 많은 이들이 알게된 박서양은 아버지를 치유해준 에비슨 선교사의 지원 등으로 제중원 의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1회 졸업생이 되었고 졸업 후 오성학교, 중앙학교, 휘문학교 등에서 화학과 물리 과목을 가르쳤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1906년 제중원 의학교 재학 중 홍석후, 이승만, 김규식, 이교승 등과 함께 황성기독청년회에 나가 학생들의 교육을 맡았고 YMCA 학당의 부학감을 맡기도 했다. 박서양은 의학적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당시 신문 대한매일신보(1907년 10월 23일)의 기사입니다.
"난산(難産)의 고통을 겪고 있던 서울 합동의 김부인을 제중원 의사 허스터씨와 의학생 박서양씨가 소생시켰다"는 기사였습니다. 나아가 한국 초기 의사였던 그는 에비슨과 함께 고종황제의 진료를 보기도 했습니다. 백정 출신이었던 그가 이토록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고 그 은혜를 그는 잊지 않고 나라와 민족에 보답했습니다!
독립운동과 교육운동 / 구세의원(救世醫院)과 숭신소학교(崇信小學校)
독립의 열정으로 교회생활과 의료사업, 애국운동을 하던 그는 일제의 여러가지 간섭 속에서 1917년 만주 길림성 용정(龍井)으로 망명해 교회를 세우고 구세의원(救世醫院)을 개업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의료활동을 하며 독립군들의 의료도 도맡아 하였습니다. 또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숭신소학교(崇信小學校)를 세워 교장으로 학생들을 양육합니다. 숭신 소학교는 애국운동의 본거지가 되어 1919년 3월 숭신소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에 의해 일시 폐교당하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는 독립운동 단체였던 대한국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에서 군의관을 맡기도 했습니다. 1919년 대한국민회 군의가 되었고, 1920년 5월 대한국민회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북로독군부 등과 연합 정책 전개함에 따라 만주에서 벌어진 의병 전투에도 종군하였습니다.
1924년 12월 기록에 따르면 구세의원에서 무료 환자 3,315명, 유료 환자 6,416명을 진료하였다고 되어있으니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았던 것입니다.
1930년 2월 19일 숭신소학교 학생 120여 명이 광주학생운동과 제2차 서울만세운동에 호응하여 연길 시내 중심가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이다가 20여 명이 체포되어 연행되었고 1932년 6월 윤봉길 의거 사건 직후 숭신소학교가 불온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임시로 폐교당했다가 다시 복교되었으나 1935년 최종 폐교당하였습니다.
그후 1936년 귀국하여 황해도 연안에서 병원을 운영하다가 1940년 55세의 나이로 돌아갔습니다. 2008년 8월 15일 독립 운동의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박서양을 모델로 한 2010년 SBS 드라마 '제중원'이 방송되었고 외국에 나아 살았던 후손들의 자료 제공으로 2013년 5월 31일 KBS 1TV KBS 파노라마에서 박서양의 일대기를 방송한 바 있습니다.
한때는 백정의 아들, 그러나 이제는 역사를 이끌어간 위대한 민족 지도자, 의료지도자, 믿음의 지도자로 살았던 생애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늘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큰 영향을 주었던 무어목사님을 다시 기억합니다.
새뮤얼 F. 무어(Samuel F. Moore, 모삼열 牟三悅 1860∼1906, 미국 일리노이주- 한국)
사무엘 무어는 1860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92년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McCormick Seminary를 졸업하고 1892년 아내 로즈Rose E. Moore, 그래함 리 선교사와 함께 32세의 나이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마펫이 시작한 성경 공부반을 도우며 1893년 곤당골현재 승동교회가 자리한 곳에서 교회를 시작했고 사회 최하층민인 백정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치며 신분제한 철폐 등 백정의 권리보장과 계몽에 힘썼습니다. 서울 근교의 순회전도로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평양 신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기쁜 소식 Good Tidings]이고 이름을 붙인 나룻배로 한강을 오르내리며 3년간 전도하여 1900년 초에 25개 처에서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 중 마포에 세워진 동막 교회는 1906년 12월 22일 그가 소천되었을 때 미 북장로교 선교부가 지정한 그의 기념 교회가 되었습니다. 1906년 장티푸스에 걸려서 46세로 소천하였고 묘소는 양화진에 안치되었습니다. 무어 선교사가 조선 땅에 첫 발을 내 디딘지 14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있는 무어 선교사의 비석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이라는 묘비명(Inscription) 새겨져 있습니다.
In loving memory
사랑하는 기억으로 씁니다
Samuel Forman Moore
사무엘 무어 선교사님
Presbyterian missionary
장로교 선교사
Born 1860 Died 1906 Aged 46 1860-1906
1860년 출생, 1906년 소천, 46세
Devoted Servant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Beautiful in character and spirit
영혼과 인격이 아름다웠던 분,
and unselfish in his love for the Korean people.
한국인들을 향한 조건없는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신
He died happy in the knowledge that he had brought many to know God as their father.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였음을 알았기에 행복하게 돌아가셨습니다.
Verily His Work. Follow Him.
이것은 그의 일이었고 또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서! 그리고 우리도 그를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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