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학교에서 교육의 방향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이들을 탁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탁월함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왜 탁월함을 드러나게 해야 하느냐?
'죄'로 인하여 가려졌기 때문이다.
하나님 주신 탁월함이
인간의 수고와 노력과 열심으로만 살아가게 되면서
죄의 습관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결과는 좋아보일 수 있어도
허무와 공허함에 붙들리게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
바로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탁월함이 드러나게 하려면 결국 2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죄의 습관을 제거해주면 된다.
아이들은 자신이 가진 죄의 습관을 직면하고,
그것을 넘어가고 이겨내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습관을 치워줘야 한다.
둘째, 좋은 가치를 행동하며 습관이 되게 하면 된다.
좋은 가치를 공부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탁월함은 행동으로 통해서 완성된다.
반복을 통하여 습관이 되게 할 때 그것이 내 존재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탁월함은 지식적인 탁월함과 도덕적인 탁월함이 있다고 말한다.
지식적인 탁월함은 교육에 의해서 얻어지면
도덕적인 탁월함은 올바른 습관들이 쌓여서 생긴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탁월함이란 무엇일까?'
대부분 '탁월함'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내리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탁월함'이란 비교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눈에 띄게 잘한다는 뜻이며,
탁월하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경쟁'을 떠 올리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교육에서 '탁월함'이란
결과가 아니다.
목표가 아니다.
어떤 것을 대하는 그 사람의 '태도와 자세'이다.
이 땅에서 가장 탁월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가장 멋지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 존재는 누구였을까?
위인전을 읽는 것은 참 중요하다.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멋지게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도전이 되고 힘이 된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일 수 밖에 없다.
하나의 빛이 있으면, 다른 쪽에 어두움이 있다.
아무리 멋지고 훌륭하다고 해도,
인간의 한계는 어쩔 수 없다.
그러고보면 이 땅에서 가장 탁월하고 멋지게 산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남들은 그렇게 보여도 자기 자신은 아닐 수 있고,
주변과 가족들은 다르게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살아간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하며,
모든 일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그렇게 이야기했고,
다른 사람도 예수님을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달라졌고,
예수님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겠다고 했다.
심지어 예수님의 동생들까지도......
그렇다면 가장 탁월한 삶은 살아간 것은 예수님이다.
삶의 결과가 탁월했고,
삶의 과정도 탁월했다.
결국 존재가 결과를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자세와 태도이다.
그 자세와 태도가
예수님에게 탁월한 삶의 열매를 맺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탁월함은 결과가 아니라 자세이며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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