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4 주제별 이야기/하나님 알아가기

부활 by 유진피터슨

꿈꾸는꼬목사 2020. 4. 8. 21:01

 

p.표지 영성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깨어 있는 관심이며, 공동체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신실한 반응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영성의 중심이다.

1. 부활의 경이

p.3 나는 하나님께 결코 성공을 구한 적이 없다. 다만 경이로움을 구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다. - 아브라함 헤셀 -

p17 내가 굳게 믿는 바는 교회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중심을 바로 잡기 위해 이 세상 중심에 세워놓으신 공동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중심 잡기의 중요한 한 차원을 영성 차원이라 부를 수 있다. 곧 일생에 걸쳐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형성해가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처음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영접한 때부터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앉을 때까지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포함된다. 영성 형성이란 바로 그 마지막 때까지의 시간, 그러니까 제단에 무릎을 꿇고 나서 트럭에 치일 때까지의 시간을 살아가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p18 이런 의미에서 영성형성은 마음과 태도나 습관을 훈련함으로써, 그저 하나의 희망 사항, 욕구, 공상 혹은 기분 전환거리에 지나지 않던 영성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실제적 삶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p19 우리가 부활에 관심이 없는 것은 부활이라는 것이 우리가 써먹거나, 통제하거나, 주무르거나, 혹은 개선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p21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경외감의 표현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활의 예배가 이뤄지지 않는다. 예수님을 만지시고 그 분의 발을 붙잡는 친밀함도 그 자체가 부활 예배는 아니다. 경외감과 친밀함 모두 이썽야 한다. 경외감이 차갑고 느낌 없는 감상이 되지 않으려면 친밀함이 깃들어야 한다. 친밀감 또한 꿇어오르는 감정에 그치지 않으려면 경외감으로 채워져야 한다.

p22 부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경이로움, 충격, 놀라움의 요소이다. 
 마태 : 경외감과 친밀감이 공존하는 경배
 마가 : 삶을 뒤흔드는 놀라움
 누가 :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다
 요한 : 사소한 것에서 포착된 부활의 인식

p35 영성형성은 부활의 분위기 속에서 이뤄진다. 부활의 분위기란 또 다른 무언가가 더 있는 상황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의 핵심을 간파하지 못하는 불안감을 감수하려는 자세, 놀람으로 인해 갖게 되는 경외심과 같은 반응을 일궈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속에서 영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

p36 경이감과 연결된 부활
 1) 사건 이전에도 부활에 대한 많은 암시나 추측이 있었다.
 2) 부활사건을 사전에 준비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3) 보잘 것 없는 주변적 인물들이 부활을 깨닫고 이에 응답하는데 매우 두드러진 역할을 하고 있다
 4) 광고도 없고 보는 사람들도 없는 아주 조용한 곳에서 조용히 일어났다는 것이다 .
 5) 두려움이다. 부활기사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는 내용이다. 

p40 두려움이란 단순히 무서워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방향 감각의 상실이다. 무서움과 함께 일ㄹ어나는 온갖 감정들, 그러니까 혼란스러움,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무지, 우리가 상상했던 것을 휠씬 뛰어넘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까지도 포함한다. 우리의 예상과 다른, 예상을 초월하는 그 상황에 하나님이 계신다.

p41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조심스럽게 그리고 열린 눈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주를 향한 두려움은 무서움의 요소가 제거된 두려움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두려움은 종종 확신과 함께 나타난다.... 부활 사건을 통해 나타나는 것은 두번에 걸친 확신이 말씀 사이에서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경외감을 담은 기쁨의 의미를 갖게 된다. 

p43 내가 확신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이 영성 형성의 중심이라면, 이 과정을 규정하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는 경이로움의 느낌이다. 경이로움이 없으면 영성 형성의 동기가 어떤 열망이나 죄책감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

p45 경이감을 상실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점점 잘하게 되고 우리 자신과, 서로 협력하는 공동체에 대해, 그리고 주변 환경에 대해 장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49 아내나 남편은 그냥 지금 이대로 만족하고 있으며 익숙해진 삶이 주는 안정감을 잃고 싶지 않다. 그래서 결국 어쩔 수 없다는 체념으로 다시 일상의 흙탕과 반복되는 지루함을 헤쳐 나가는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 

p51 일터야 말로 영성 형성에 있어서 가장 큰 위협이 되어왔다. 우리가 경이감을 별로 느끼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경이감은 사라진 것이나 다름 없다. 일터에서는 우리가 유능하게 일을 잘하고 있뜬지, 아니면 지루하거나 산만해 있든지 둘 중 하나다. 기독교적 조성 곧 영성 형성이 끊임없는 부지런함을 요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p54 예상을 넘어서는, 예상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자세는 그런 일터에서는 생기지 않는다.

p54 일터에서 어떻게 경이감을 키울 수 있다는 말인가? 곧 거룩한 안식의 날을 지키는 것이다. 부활의 현장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바로 전날 안식일을 지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p56 그들이 가장 하고 싶어야 하는 것은 무덤에 계신 에수의 몸에 향유를 바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일을 하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노예 생활에서의 구원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안식일 준수는 금요일의 사건들이나 그들의 처참한 기분을 보다 넓은 안목으로 보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나 그들이 하고 싶은 일 중 어느 것도 하나님이 하셨고, 또 하고 계시는 창조와 구원보다 우선되지 않는다. 

p57 안식을 지키고 다음 날 아침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을 때는 하나님을 향한 감각이 마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너머 존재하는 신비로움에 경이감으로 응답하는 능력, 이해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는 것에 놀랄 줄 아는 능력이 준비되었던 것이다. 

p58 안식일 준수, 곧 계획적으로 그리고 결연히,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는 저항의 자세로 하루를 보냄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가 어떤 일을 하고 계셨는지 보다 자유로운 눈으로 보고 응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p59 우리는 일터로부터 어느 정도 마음의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마음의 거리를 확보할 수 있을까?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안식과 일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제일 처음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심을 관찰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일터에서 일하고 계시는 모습을 본다. 

p61 우리의 일 속에는 일 이상의 의미가 있다. 곧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안식일은 일과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일을 바탕에 깐, 그 이상의 것이다 .

p62 안식일은 분명 일손을 멈추고 침묵함으로써, 이윽고 깜짝 놀라 열린 눈으로 부활의 경이를 볼 수 있을만큼 충분히 일손을 멈추고 침묵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바로 그것에 의해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우리는 일과 일터라는 기반과 정황 속에서 하나님이 계속해서 하고 계시는 바로 그 일에 응답하며 그 일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부활이라 부른다.

2 부활의 식사

p67 살아있는 자들의 땅은 분명 낙원 같은 휴양지가 아니다. 오히려 전쟁터에 가깝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자녀들과 더불어 자리를 잡은 곳은 바로 이런 곳이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을 앞지르는 삶을 선포하고,모든 삶의 유기적 연관성과 그 소중함을 증거하며, 부활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간다.

p69 시편 116:9 "내가 살아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

p72 우리의 삶, 부활에 기초한 영성 형성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삶 사이에 이런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p72 어린이들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분리됨으로써 생겨나는 무의미함과 단조로움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최고의 방어막이다.

p77 나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근본적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한다. 이 정체성은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 과정을 통해 더 자라고 성숙해질 것이다 .

p78 우리이 뒷걸음질이 눈에 뛸만큼 극적인 경우는 거의 없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과정이 종종 친구나 동료, 상관 혹은 교인들의 눈에 우리가 가장 성공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바로 그 무렵에 일어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성공적으로 보이지만 벌써 생명은 밖으로 새어나가고 있다. 하나님과 삶이 단절되어 버린 것이다. 

p82 부활이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초월적 사건이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행위인 식사와 하나가 된다. 그래서 접대를 소홀히 하는 문화는 부활의 배고픔에 직면할 공산이 크다. 

p91 영성 형성을 위한 기독교적 훈련이 일상의 삶과 분리된 어떤 것을 만들어낸다면 이것은 매우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음식을 먹는 것보다 더 일상적인 일은 없다. 

p95 식사를 통해 관찰되는 것.
 1)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은 특별히 준비된 환경이라든지 세심하게 선택된 시간이나 장소 등에 좌우되지 않는다. 원칙은 오히려 평범하다. 
 2) 두번의 식사가 모두 본래적인 의미의 식사였다는 것이다. 
 3) 식사 이야기에서 모두 부활을 인식하거나 깨닫는 일이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 시간이나 부활하신 에수와 함께 있으면서도 사태의 진상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들이 믿게 된 것은 부활을 받아들이고 부활에 참여하고 간여하면서였다. 식사는 바로 이런 체험을 위한 이상적인 정황을 마련해주었다. 
 4)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예수의 부활을 작동시킬 수 있는 확실한 도식을 고안하겠다고 나서는 일이 없도록..
 5) 두 식사 모두 식탁의 주인이 예수님이셨다는 겁니다 .

p105 식탁에서는 나만의 세계에 머물거나 자기 충족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우리는 십자가 안으로 이끌어간다. 우리는 함께 식사를 나누며 이 십자가를 몸으로 표현한다. 우리의 교만과 자족감이 깨어지면서, 새로운 삶, 새로운 행동이 우리 앞에 제시된다. 식탁 위에 놓인 것은 모두 생명의 교환, 곧 우리의 주인에 대한 나름의 히생을 가리킨다.

p108 우리 모두는 여전히 음식을 먹는다. 그래서 식사는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을 실천할 수 있는 주요한 출발점이며 마당이요. 조건이 된다

p108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에서 가장 핵심적인 의식은 주의 만찬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네개의 행동.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셨다. 바로 이것이 돔 그레고리 딕스가 말한 '성찬의 형식'이다.

p111 성찬의 형식
 1)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을 가지신다. takes 
 2)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고 간 것을 축복하며 감사하신다. thanks
 3)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고 간 것을 떼신다. breaks
 4) 예수님은 우리가 가져간 것을 다시 나눠주신다 gives

3. 부활의 친구들

p118 좋은 친구 관계에서는 종종 한 사람이 나머지 사람들보다 자신을 낮춘다. 다른 친구가 자신보다 휠씬 더 나은 것을 보고 그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c.s.루이스

p123 진정한 영성 형성을 위해서 우리는 얌전한 평신도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라는 마귀의 부추김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평신도 근성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품 계발이나 교회의 복음 전파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본연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회복하는 일이다. 

p126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영성 형성의 핵심이 된다. 내가 의도하는 바는 부활의 무대를 우리 생각의 중심에 재확립하는 것이다 .

p129 예수님의 부활은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친구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부활이란 서로 인격적으로 얽히는 법이 없는 불특정한 군중들 앞에서 일어나는 무슨 공연 같은 사건이 아니다 .부활이 우리를 인도해 들어가는 곳은 서로가 서로를 의존하는 공동체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독자적인 존재로 생각할 수 없는 남자들, 여자들, 혹은 아이들의 공동체다. 하지만 이런 부활 공동체는 결코 획일적인 것이 아니다.

p132 세 개의 동사가 그들이 살아가는 부활의 삶을 움직여간다. 훈련하고, 세례를 베풀고, 가르치는 일이다.

p138 기독교적 영성 형성이란 본질적으로 부활의 실천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친구들 중 한 사람이 된다. 

p141 
 1) 예수님의 부활에 직접 참여하는 일이란 결코 전문적인 영적 엘리트를 만들어내는 법이 없다.
 2) 예수님의 부활에 의해 조성되는 삶이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차원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는 것이다.
 3) 복음서 저자들의 부활 이야기와 바울 서신들과의 어울림이다. 
 4) 예수의 부활과 동일한 부활에 참여한다는 바울의 단호한 주장은.....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부활에 의해 조성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를 쳐다보거나 모방하거나 그 분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 분과 함께 일으키심을 받음으로써 간으해진다. 

p148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은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바로 이웃이다 .

p149 친구 관계에는 다분히 묵상의 요소가 존재한다. 서로의 독특함을 충분히 느끼고, 나 자신 밖에 존재하는, 나 자신을 넘어서는 실재로부터 흘러나오는 선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p155 자율성이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우리를 단절시킨다면,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문화는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삶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단절시켜 버린다 .

p155 부활의 삶은 실천하는 것이다 .의사가 개업하여 의술을 시행한다고 말할 때처럼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실천을 말한다. 우리의 본지로가 우리의 하루 일과를 전부 규정하는 그런 일이다. 부활을 경험한 친구들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친밀한 임재로 가득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부활의 삶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분은 살아서 지금 여기 계신다. 부활을 실천한다는 것은 이것을 알아채고, 그 속에 들어가 거기에 몰입하는 것이다. 

p159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영혼으로써 우리의 본질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거룩한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우리가 받은 세례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이 세례는 우리의 이름이 불리는 곳이며, 우리의 이름이 불리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공동체다. 

p161 세례 의식 속에는 두 가지 명령이 암묵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회개하라. 따르라!!

p165 우리의 삶은 세례를 통해, 부활에 의해 규정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언제나 초보자일 뿐이다 - 칼 바르트 0

p19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역사했던 그 능력이 우리 믿는 자들 속에서도 역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 그 능력의 움직임 속에 우리 의 삶을 맡기는 헌신의 행보, 바로 거기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